가해 연중제5주간 화요일 마르7,1-13 (스승// 250211 행운동성당)
마르7,1-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지 말고,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지 마라에서 “헛되이”라는 말은 “마텐”이라고 되어있는데 마텐은 “운으로/우연히”라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운으로/ 또는 우연히 섬기지 마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우연히 섬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느님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섬겨야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은 운이 좋을 수 있지만 일년 내내 운이 좋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운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씻지 않은 손으로, 즉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게되면 운이 나쁘게 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그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잘 알고 계셨기에 아예 운이 나쁠 수있는 가능성을 모두 없애버리십니다.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모든 음식이 깨끗하니 손이 음식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지 음식을 먹을 때에 사용하는 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손을 씻는 일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때와 장소에 맞게 씻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복음서에서 씻는 사람의 모습은 크게 세가지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첫째는 오늘 복음에서 한움큼의 물로 자기 손을 씻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장면인데 예수님으로부터 발씻음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셋째는 요르단강물에 온몸이 잠기도록 몸을 담가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는 정결예식의 세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손씻음과 발씻음, 그리고 온몸씻음 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손씻음을 가르쳤고, 예수님은 발씻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온몸씻음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의 이 두 씻음은 전혀 다른 의도와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니는 예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손씻음을 일컬어서 그들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주장했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은 실용적으로 받아들인 이방인의 전통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손을 씻다”는 말에서드러나는데, “씻는다”는 말은 “밥티스모스”로 되어있는데 “밥티스모스”는 세례/세탁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온 몸을 물에 잠기도록 담그는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밥티즈도)와 같은 어원을 지닌 씻음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장했던 손을 씻는 예식은 온몸을 씻는 예식의 일부분에 해당된 예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했던 손씻음은 세례자 요한의 예식을 모방한 부분적인 세례예식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예식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마태21,25)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고대근동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방인지역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발씻음은 전체를 의식하는 온전한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고 할 때에 “발씻음”은 “닙테르”라고 되어 있는데 “닙테르”는 '대야에 받쳐 물을 부어서 씻는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여기서 물을 대아에 떠받치고 씻는 모습은 분명 한움큼의 물로 손을 씻는 예식과 확연이 다른 모습입니다. 하느님 창조질서를 떠올려주는 정결한 예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하느님 계명에 따라, 그리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섬기기 위해 베푸는 예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부분적인 깨끗함이 아니라 전체가 정결하고 깨끗해 질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