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4주간 토요일 마르6,30-34 스승같은 제자(스승)
제가 서품을 받은지는 몇개월 안되었지만 강론하기 시작한지는 상당히 된 것 같습니다.
부제만 1년 7개월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강론 준비를 할 때마다 느끼는 고통스러움이 있습니다.
예전에 썼던 내용을 다시 쓰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건데요.
그러다보면 종종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내용을 강론이라고 썼는지 스스로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 엉터리같은 강론을 듣던 회중들의 반응은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아니 그때 뿐만 아니라 언제나 회중들의 반응은 좋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강론을 한심하게 잘 하든 똑 부러지게 잘 못하지 않든 언제나 좋은 호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본 불변의 법칙을 깨고 한 가지 강론의 원칙이 만들어지는것 같습니다.
그것은 강론하는 사람이 강론으로 청중을 괴롭혀도 청중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강론자가 복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씀을 질식시켜 내 밷어도
청중이 그 질식된 말씀을 호응해주면 다 죽어가는 말씀이 생생히 살아나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괴로운 일입니다.
같은 말을 또 들어야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또 듣고 하루종일 그것 때문에 분심에 잠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불변의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듣는 청중의 삶과 영성이 강론자의 삶을 능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어머니같은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아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흐뭇해 하지 않을 어머니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갔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들의 특성상 목자가 없는 양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양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여러분의 이 공동체가 하나의 목자가 되고 여기 와서 강론하는 제가 흩어진 양이 된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본당공동체에 있는 목자라면 신자들이 흩어진 양이 되겠지만
하나의 지향으로 일치해 있는 공동체의 눈으로 본다면 구조적으로 강론자가 흩어진 양이 됩니다.
여기저기서 한 공동체 아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십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고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헌신적인 삶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언제나 빈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자랑으로 여기며 기꺼이 검소하게 파견되었고 검소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혹시라도 제자들이 돌아 올때에
무슨 소득이라도 챙겨서 왔다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돌려보내셨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할 때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순수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감동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쉬러 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빈손이었지만 행복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사람들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어느새 제자들의 모습에서 목자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스승같은 제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생각해보고 착한 목자의 모습을 닮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본불변의 법칙은 깨지지 않습니다.
다만 독자들의 마음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질 뿐입니다.
목자없는 양떼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본에 덧붙이는 찰고는 하나의 지향으로 일치하지 않는한 흩어진 양떼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