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4주간 화요일 마르5,21-43 복된동정(대전협)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새해 인사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새해 건강하세요 라는 의미로 드리는 인사이고
다른 하나는 새해 부자 되세요 라는 의미로 드리는 인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복의 개념은 건강과 돈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 더 마음이 쏠리게 됩니까?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복은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와 명예가 보장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 건강한 젊은이와 아리따운 동정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창 생명이 꽃 필 아리따운 나이에 한 남자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였던 동정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진자가 모든 것을 가진자다"(성안토니오 다블뤼 주교 1818-1866 48세)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살리십니다.
먼저 열두 해 동안아나 하혈하는 여인을 살려 주십니다.
열두 해동안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하혈하는 여인이 바라는 것은 구원이었습니다.
의사도 손 쓸 수 없이 되어버렸기에 여인은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12년간 병치례를 하다보니까 이제는 병이 나아서 건강해 지는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건강해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온 것입니다.
여인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낫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며 이제는 구원에 목말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벼랑끝에선 한 여인이 선택한 것은 건강이 아니라 구원 받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돈이 있을 때에는 건강해 질 수 있다는 기대를 많이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대를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혹시 기대와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 아세요???
기대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일입니다.
여인이 재물이 있을 때에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사람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자신을 건강하게 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으로 벼랑끝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펼쳐 옷자락이라도 잡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구원을 받고자 기도를 했는데 건강해진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겁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리십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병들어 죽게 되었던 회당장의 딸을 일으키신 다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모두들 죽은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다녔습니다.
이렇게 열두 살 소녀가 살아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라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먼저 열 두살 어린소녀의 가정적인 동정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절제와 검소함이 몸에 밴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회당장이란 그 고을의 최고 책임자로 원로들 가운데서 뽑힌 지도자였습니다.
적어도 유다 이스라엘에서는 존경받고 덕망있는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장에게 12살난 어린 딸이 있다는 것은 그가 늙으막에 얻은 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어린 아이가 무슨 일을 하면 가벼워 보이고 또 그래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가 어려서 그렇지 라며 철부지 취급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신앙심에서 만큼은 어린이들이 어른 못지 않은 예를 흔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며 아버지께 묻습니다.
아버지 장작과 불은 있는데 하느님께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단다 라며 둘러댔습니다.
그러자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대답에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이 백살이 넘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신앙심에서 만큼은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모리아산에 제물로 바쳐질 때에 어린 아이였던 이사악은 자신이 하느님께 바쳐진다는 것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이사악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두려워하기보다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웃음과 미소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는 어른 스러운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이란 이름이 웃다 미소를 짓다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어렸지만 그가 어깨에 짊어진 장작 위에 이제 곧 자신이 올려진다는 것을 알고도 그 어떤 거부없이 미소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바쳐진다는 의미를 어린나이에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동정 생활의 삶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심 깊은 회당장의 어린 딸아이와 같은 동정 생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혈하는 여인과 같은 동정생활의 모습입니다.
동정생활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고 복된 생활을 하도록 초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복은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가진자가 모든 것을 가진자다 라는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곧 우리가 바라는 복이자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아이는 아이로서, 어른은 어른으로서 각자의 본분에 충실한 모습으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