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1주간화요일 마르1,21ㄴ-28 겸손한 믿음(강남터미널안나은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가르치셨길래 사람들이 몹시 놀라게 된 것일까요?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권위가 무엇일까요?
그 권위있는 말씀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본문 23절 이하에 그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영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을 가르치십니다.
즉 영을 다스리십니다.
거룩한 영이든 더러운 영이든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언제나 영이십니다.
영을 가르치시되 선한영은 살리시고 악한 영은 꾸짖으십니다.
올해 들어 제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고작 80년이라 했는데
이제 저는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서 부쩍 제 육신은 영혼의 도구일 뿐이라는 영적인 매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제 주변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쓰러져서 실려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꿋꿋이 싸우고 견디고 인내하며 잘 살아갈 것만 같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유성처럼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데 왜 쓰러지는 걸까요?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더렵혀졌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은 자존감, 수치심, 모멸감, 분노함, 자격지심으로 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내가 힘들고 지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영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회당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모욕한 사람은 좀 있어보이고 뭐를 좀 아는 사람인가 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몇년을 함께해도 그분이 누구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제자들과는 달리 학식과 경륜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솔했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서 이루실 미래의 사명까지를 마치 자기가 온전히 다 알고 있듯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키셨다가 다시 결합시키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을 이리저리 분리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며 보잘 것 없는 시골 출신이신 예수님의 인격성을 꼬집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신성을 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며 예수님을 극도로 높였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알아본 하느님의 속성을 예수님의 겉모습에 뒤집어 씌웠습니다.
높였다가 낮췄다가 낮췄다가 높였다가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다루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 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마음대로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떨결에 고백했다가 예수님이 죽으실거라고 하자 자기가 예수님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던 장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에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시고 확실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잘 꾸짖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그처럼 올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되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말씀을 내 말인양 착각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나는 내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맙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오늘 하루 내 영혼이 구원의 샘에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5/01/10 [ 값진 고통 ] 마르1,21-28
참 진주가 되려면 살을 애는 듯한 고통을 품고 긴 세월을 살아야만 한다.
모난 돌을 품고 움직이면 고통은 더 심해지지만
아름다운 빛깔의 보석을 만들기 위해서 그 움직임은 꼭 필요하다.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지 않았거나 내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았을 때,
불쌍한 이웃을 외면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때,
도움이 필요한 형제의 눈빛을 외면하였을때,
내 안에 깊숙이 숨어있던 모난 돌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외침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악령들린 사람이 발작을 일으킨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유독 한 사람이 고통스러워한다.
주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약점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인듯한데
완전한 사람으로 치유되기 위한 과정이 아닐런지...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악령이 떠날 때
내가 품고 있던 모난 돌이 차춤 둥글고 아름다운 빛으로 변해서
값진 진주, 완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