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대림제3주간 수요일 마태1,18-24 성령의 법(성바// 241218 성바)
야콘을 했으면 결혼을 해야지~~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과 약혼을 한 마리아가 파혼 당할 위기에 직면하는 장면을 소개해줍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만일 요셉의 처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했지만 나는 과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갹해보게 됩니다.
만약 넓은 마음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그 자체로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 지켜야할 약속을 어긴 팔염치한 인간으로 낙이 찍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요셉이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은 죄인이 되고, 마리아는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은 부정한 인간으로서 할말 없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즉 평생을 벙어리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요셉은 결국 법대로 살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율법을 지키기보다 성령의 법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여태껏 지켜오던 법을 저버리게 되면서 요셉은 스스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죄를 짓고 그 지은 죄가사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의로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로 인해 죄인이 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이 살리신다는 뜻이고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계신다는 뜻입니다.
둘이 하나가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계시면 우리는 영원히 살아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을 수 있으며 죄인으로 몰리기 쉽습니다.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정의롭기보다 하느님 앞에서 의롭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셉의 의로운 행동도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마리아의 피앗이 없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만약 마리아의 피앗이 선포되지 않았다면 결코 요셉의 임마누엘 또한 실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류의 정의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지키기를 원하는 의로움이 어떤 의로움인지를 요셉의 임마누엘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17 마태1,18-24
명동성당에 가다보면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흘러 나오는 최신 가요와 팝송들이
점포를 지날 때마다 제 목소리를 내며 겹쳐져서 소란스러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성당으로 가까이 갈수록 점점 조용해지고 차분해져서
평화로움마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성당 입구에 가까이 가면 노래하는 장애자 한 분을 볼 수 있다.
녹음기에서 반주가 흘러나오면 이에 맞추어 열심히 노래를 한다.
나는 아주 가끔 명동성당을 가는데
그 때마다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그 분에게는 그 일이 생활처럼 되었으리라.
지체장애에 언어장애자인 그 분에게 노래는
처음부터 두렵고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장애자로서 지내기로 마음먹고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아무일도 하지않고 살았더라면
지금의 모습보다 더 못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듣고 그와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두려운 마음을 어느 누가 알아주었을까?
만약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생활에만 안착했더라면
마리아와 예수님을 살릴수 없었을 것이다.
평범치 않았기에 고향을 떠나 에집트로 갔고
돌아와서도 시골 나자렛에서 살수 있었던 것이다.
평범했던라면 애초에 사람도 살리고
주님도 살리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2004/12/24 루카2,1-14
오후 구름 한점없는 하늘에 까치들이 날아 들었다.
대략 백여마리정도 되는데 뭉게구름처럼 몰려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까치는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 있었나보다.
까치는 가끔 강아지가 자는 동안 두발뛰기로 다가와
밥그릇을 넘보기도 하는데 그땐 정말 귀엽다.
성탄 전야미사를 해뜨는 마을에서 드렸다.
특히 성탄을 맞이하여 기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다린 사람만의 축복이라는 강론을 듣고
구세주로 오시는 아기예수님을 정말 간절히 원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지금 나에게는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기쁨 필요하리라.
그저 지나가는 기쁨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