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34주일 그리스도왕대축일 루카23,35ㄴ-43 무능의 은총(딸)

jasunthoma 2013. 11. 24. 06:56

신학교 수업 첫 시간 신학원론 첫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수 신부님이 칠판에 "신경"이라고 썼습니다.

그러고는 여기 있는 이 단어를 설명해 볼 사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출석부를 보더니 한 명을 지목하여 불렀습니다.

그 신학생이 일어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신경"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경이란 만지면 느껴지고 상상(생각)하면 세포가 살아나서 자극을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하고 더듬더듬 말하였습니다.

그 신경이 그 신경이 아니지요??하고 교수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고백하게 될 우리의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학생이 설명했던대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 우리의 감각기관인 세포가 살아나서 부들부들 떨리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외웠던 그 신경이 이제는 아무런 감흥 없이 바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문에 오늘날자로 기사가 났습니다.

"신앙의 해" 폐막 남긴것이 무엇인가?

"참 신앙" 찾기 위해 분주했지만 성적은 부진했다는 겁니다.

선조들이 고백했던 그 신앙 감각/ 신앙감도를 다시 살려보고자 작년 한 해동안 각 교구차원에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서울교구는 다섯가지 주제를 가지고 우리의 참 신앙을 찾고 신앙 기초체력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말씀으로 신앙을/ 기도로 신앙을/ 교리로 신앙을/ 미사로 신앙을/ 친교로 신앙을 다지고자 노력했습니다.

사제는 사제 차원에서 신자는 신자차원에서 성경필사는 기본이고 공의회 문헌과 교리서 필사/ 각종 강연회/ 세미나/ 성지순례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신앙의 해" 의미와 실천사항을 환기시킴으로써 모든 신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1년의 숨가픈 여정이 남긴 것은 열심한 신자들만의 신앙의 해였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열심한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의 해 선포 사실 자체를 모르는 신자가 3분의 1이고

교구나 본당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에 참가여부에는 3분의 2가 부정적이었던 걸로 집계되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이 식어버린 것을 확인하여 질책을 받는데에 만족해야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 현실은 이런 것 같습니다.

뜨거운 감자가 있는데 그저 식을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은 감자를 먹으면서 맛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뜨거운 감자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깝짝 놀라죠.

말 못할 고통스러움에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날 것입니다.

뜨거운 것이 속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말씀을 삼킨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뜨거운 기도/ 뜨거운 교리/ 뜨거운 미사/ 뜨거운 순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못할 고통이 고독이 그리고 시련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은총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불덩어리를 삼키기보다 오히려 속에 있는 불평들을 내어놓습니다.

세상이 너무 편해졌다고하면서도 진정 불편함이 다가오면 회피하고맙니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불편함은 무엇일까요?

교황 바오로6세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의 창립자는 불편함을 실천적으로 산 증인이었습니다.

성소와 정신에 교황님의 증언이 이렇게 나옵니다.

"이분이야말로 침묵 중에 겸손하게 그러나 현대에 알맞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의 거대한 수도회 건설은 경애하고 존경할 야고보 알베리오네 창립자 신부 덕분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겸허하고, 말이 적으며, 피곤을 모르고, 언제나 주의 깊고,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는 전통적인 표현대로 기도에서 일로 옮겨가는 생각에 언제나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속으로 고독 속으로 시련 속으로 일부러 찾아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경험한다고 올래길이며 둘레길이며 다니면서 참으로 져야할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십자가는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능력함, 모자람, 덜떨어짐

이는 스마트한 시대에 역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는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시련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적 문제는 외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선포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 옆의 두 강도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무능함을 불평했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말 외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가난하고 겸손한 정신을 청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