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제13주간 수요일 성토마스사도축일 요한20,24-29 살가운 믿음
수사님 중에 한 분이 저보고 혹시 음식 중에 못 먹는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복숭아를 못먹는다고 말했습니다.
복숭아 털과 약간 신 듯 하면서 끈적끈적한 과즙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복숭아만 먹으면 두드러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렇게 대답하고나서 저도 마찬가지로
그럼 수사님은 못 드시는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사님은 자기는 뭐든지 다 먹기는 하지만 두 가지만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없어서 못먹고 둘째는 안줘서 못먹는 것이라며 능청을 떨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없음과 있음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못 믿는 경우와
믿음이 있지만 믿기지 않아서 못믿는 경우입니다.
첫째의 경우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믿음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믿음이 없고 확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거나 오감으로 확인이 되더라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인이 되었으니 인정하는 선에서 절충선을 긋습니다.
둘째의 경우는 토마스의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한때 토마스는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각오할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니까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반발을 하고 맙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토마스는 주님을 뵈옵는 것 만으로는 불만족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옵기는 했지만 그저 두려운 나머지
얼굴도 똑바로 못 처다보고, 말도 못 붙여 보고, 손을 잡거나, 볼을 부비거나,
얼싸 안아 보거나, 발을 씻어 드리는 등의 행위가 뒤 따르지 못한체 단순히 믿어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평소에 토마스가 예수님과 어떻게 살갑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일방적인 만남은 아무런 감동없이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여러 제자들은 주님이 살가운 친구가 아닌, 편안한 주님이 아닌,
수평적 관계로서 허물없으신 주님이 아닌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에게 있어서 주님은
그 분이 우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셨듯이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다섯 상처를 닦아 주고, 약을 발라주고,
싸매주는 관계로서 나아가야 한다는데 그 지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용기는 단순히 주님을 보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늘 깨어서 주님과 이야기하고, 속삭이고, 청하고, 듣고,
묻고하는 끊임없는 대화와 살가운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토마스 처럼 주님을 권위있으신 분이 아닌, 두려운 분이 아닌,
편안한 주님으로 맞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살가운 믿음으로 다시오실 분을 맞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