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부활제6주간 금요일 요한16,20-23ㄱ 사랑의 조연(성바/성바)
매번 영화만 보다가 어젠가 한 번은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소극장이라서 그런지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극을 시작하자 주연 배우는 그대로인데 조연배우는 계속해서 역할을 바꿔가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보면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연배우가 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었습니다.
99명의 변호인단이 소개될 때에 뭔지 모를 힘이 샘솟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봐 왔던 대로가 아니라 다시 태어난 상태로 보겠다는 말씀입니다.
아픔을 겪어 본 다음의 사랑은 분명히 그 전 사랑과 다릅니다.
아픔을 겪기 전에는 무조건 주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전 존재를 다 주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아픔을 겪어낸 다음에는 그렇치 않습니다.
주기는 주지만 꼭 필요한 것을 줍니다.
그리고 받을 줄도 아는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에서 서로 협력하는 친교의 사랑으로 바뀌는 겁니다.
안 좋은 것을 받고 좋은 것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람 속에 쌓인 근심과 걱정 분노와 질투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 있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온화한 기쁨을 주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필요할 때에 줍니다.
그때까지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랑입니다.
달리 말하면 맞춰주는 사랑입니다.
주도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조연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계시 때에는 주인이셨고 스승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말씀만 하시면 무조건 나았습니다.
아픈사람은 쉽게 나았고 죽었던 사람도 벌떡 일어 나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연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육신을 취하신 나자렛 예수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단 한 분 안에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다릅니다.
주인이 아니십니다.
스승도 아니십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보게 될때에는 더 이상 당신은 주연이 아니라는 의미를 띄게 됩니다.
이제는 위로자이시고, 협력자이시고, 조력자이십니다.
스스로 조연이 되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손에 손을 잡아 일으키거나 호통을 치며 마귀를 쫓아 내지 않으시고 협조자를 보내시고 변호인을 보내시겠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 육신에 묶여 계실 때에는 육체적인 원리를 따라 사시면서 당신과 살갖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주실 수 있었지만
승천하신 다음에는 전혀 새로운 모습인 영혼의 원리를 따라 영적인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이 모든 이에게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육신의 제약에따라 제자들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계시하실 수가 있기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 사랑의 조연이신 스승의 소식을 기쁘게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