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성주간 수요일 마태 26,14-25 불안한자신

jasunthoma 2012. 4. 4. 05:0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태어나지 않는다면 자기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존재할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유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여기서 '자신'이라는 의미는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신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영신의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태어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면 이는 숨겨진 자아를 개발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숨겨진 자신을 태어나게도 하고 태어나지 못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을 세상밖으로 탄생시키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아가 다 우리에게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나타나면 자신에게 더 좋을 수가 있고 나타나서 자신에게 더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신 태어나지 말아야 할 자신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사고파는 데에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무엇일 때 가능해집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귀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구약에서 유다는 이미 자신의 동생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스승이셨습니다.

유다에게는 누구보다 더 팔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나머지 제자들에게만은 곧 그들의 왕으로 등극하실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은 치밀한 계산으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파악 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고 또 보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두 손으로 온 몸으로 만지고 또 만져보아도 도저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집중했던 자아개발은 바로 이성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깊이하고 사리에 밝은 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육신의 증거가 충분해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자신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답은 어제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스승님을 향한 충성심에 의심이 발생하자 베드로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분을 지키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불안스럽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온전한 형태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지내시면서 예수님 안에서 태어나지 말아야 할 자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