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서를 읽고
거룩한 독서를 읽고
20051107 김용석
제1주간: 원조의 역사
범 위: 창세 1-11장
<요약>
“한 처음에” 하느님 홀로 등장하여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분 말고 어느 누구도 없으며 하느님 홀로 존재하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혼자서 만드신 분이다. 그분은 자연의 영향을 받거나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는 신이 아니며 아무도 그분과 경쟁할 수 없다. 그분은 창조된 모든 인간과 사물의 주인이시다. 그분 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세상과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그분 안에 기원을 두고 그분에게서 생존과 이름과 기능을 부여받는다. 하느님은 창조의 질서와 존엄성을 증언한다. 모든 것을 계획에 따라 질서 있게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분의 주권과 완전한 지식과 선하심에서 나온 창조의 질서가 심연과 혼돈(1,2)을 몰아낸 것이다.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사람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람만이 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 ‘하느님과 비슷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피조물 가운데 사람만이 땅을 다스리고 지배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근본인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분에게서 독립하려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 동료와 인간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깨뜨리고 불행을 자초한다.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 그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으며 그 결과 사람은 하느님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존재임을 다시금 깊이 인식하며 제 몸의 근원인 땅의 먼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다시는 하느님과 동료인 인간과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다는 성서의 중심 사상이 나타난다. 장자인 카인에게는 아버지의 특별한 축복을 받는 혜택과 동생보다 유산을 두 배나 더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형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생 아벨의 제물을 눈여겨보셨던 것이다. 카인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자신을 배척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는 감히 하느님께 직접 대들 수는 없었기에 그분이 편애하시는 힘없는 동생을 들로 데리고 나가 쳐 죽였다. 아담의 경우와는 달리 카인은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께 항변을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다시는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며 목숨을 빼앗길 위험에 처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불손한 항변과 뻔뻔스러운 한탄에 귀를 기울이신다. 카인의 울부짖음을 기도로 받아주신 것이다. 카인의 애절한 호소가 서슬 퍼런 되갚음의 정의를 한순간에 자애로움의 정의로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세상에 사람들의 악이 넘쳐나고 그들 마음의 생각과 뜻이 늘 악으로 기울어지기만 하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창조를 후회하시며, 그들을 땅위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신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이런 악조건에서 계속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래서 홍수(물)로 세상의 악을 씻어 내리라고 결심하신다. 자신의 죄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과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처벌하면서 결코 의인을 함께 희생시키지 않으신다. 홍수가 끝난 뒤에 밖으로 나온 노아는 하느님께 번제를 드렸다. 그리하여 ‘자손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지배 하여라’고 한 본래의 명령을 다시 갱신하신다. 그러나 계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인간의 죄는 멈추지 않는다. 하루는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 천막에서 곯아떨어졌다. 이 광경을 본 함은 아버지의 몸을 덮어줄 생각은 안 하고 다른 두 형제 셈과 아벳에게 알려 부끄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하였다. 셈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을 잃지 않은 착한 아들이지만, 그들의 원수 함족인 가나안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조상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나쁜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의 계약 이후 인간의 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인간이 개발하고 발전시킨 물질문명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해주는 순기능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주권과 권위에 도전하려는 행위로 나타났다. 이에 하느님은 교만에 빠진 자들을 직접 벌하는 대신, 그들의 동일한 언어를 뒤섞어 놓고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버림으로써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셨다. 노아와 바벨탑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과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은 내치지만 당신께 순종하는 이에게는 도움과 구원을 주신다는 진리를 증언한다.
<묵상>
인류 원조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은 무지로부터의 탈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이브의 무지에서부터 카인의 무지, 노아시대에 흥청대며 먹고 마시던 무리들의 무지, 함의 무지, 바빌론 사람들의 무지로 이어지는 인류의 원조적 역사는 자기 자신의 근본을 망각한 무지의 일면이다. 그리고 시대가 흐를수록 그 무지의 범위가 점차적으로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지의 근본을 찾아서 그 근본적인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날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고 한 이사야예언자의 말이 실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제2주간: 아브라함
범 위: 창세 12,1-25,18
<요약>
아브라함은 그 당시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 우르라는 도시에서 살다가 하느님께 직접 불림을 받았다. 하느님은 그에게 수메르 도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째는 고향과 아비의 집 대신 미지의 땅을 얻을 것이다. 둘째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셋째는 아브라함은 이름을 떨칠 것이다. 넷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는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보장한다. 끝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들을 바탕으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다. 하느님의 편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선택은 아브라함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세상 전체에 대한 자애로움의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안정된 우르의 생활을 버리고 곧바로 하느님께서 방향을 제시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일흔 다섯의 늙은 나이에 그는 안주에서 순례로 인생행로를 바꾼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라의 불임과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명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굳은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이지만 그가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믿음을 완전하게 실천하였던 것은 아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건너간 일과 주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채 인간적인 기지를 발휘한답시고 이집트인들에게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여 소개하는 바람에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으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불행을 면하기도 했다.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의 말씀 한마디에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순례의 길을 떠났으며 외아들마저 봉헌하려할 정도로 철저하게 순종한 아브라함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리라고 미리 알려주기까지 하시어 그를 곤경 속에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으셨다. 이런 믿음과 순종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묵상>
믿는다는 것은 실현 가능한 것을 따른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것, 인간의 능력 밖의 일,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 인간의 머리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에 그것은 분명히 믿음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내게 이로운 말씀에만 믿음을 둘 것이 아니라 내게 득이 되지 않고 해가 되는 일에도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초월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갈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3주간: 이사악과 야곱
범 위: 창세 25,19-36,43
<요약>
이사악의 생애는 아버지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25년 동안 기다려서 얻은 믿음의 상속자이며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 될 때 그것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당연히 순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이사악의 조용한 삶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축복과 이 축복을 얻는데 필요한 믿음이 중단 없이 다음 세대에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아사악은 이 축복과 믿음의 영속성을 수동적으로 따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내 리브가는 야곱에게 장자권과 그에 따른 복이 돌아가도록 능동적으로 계획을 짜고 이를 과감히 실행에 옮긴다. 에사오는 자신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죽이려 한다. 에사오는 하느님의 선물인 장자권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것과 직결된 축복은 얻고 싶어 하였다. 은총과 축복은 언제나 같이 따라다닌다. 은총을 잃어버린 사람은 축복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하느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에게 이 선택에 합당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상대적으로 형보다 가난한, 곧 기득권에서 소외된 아우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꿈에 나타나시어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하신 것처럼 땅과 후손과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에 야곱은 조건을 제시하여 하느님을 자기 주님으로 받들겠다고 응답한 반면에 하느님은 야곱에게 조건 없이 도움을 주신다. 야곱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많은 재산과 자녀들을 얻게 되었다.
야곱은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과 씨름을 한 끝에 ‘하느님과 싸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느님은 야곱의 신뢰와 노력을 인준하시고 야곱은 더 이상 하느님과 거래를 하지 않으신다. 야곱은 믿음의 사람이 되려는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유일하신 주 하느님을 섬기기로 다짐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하신 약속의 혜택을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주실 것이다.
<묵상>
하느님은 성실하시다. 성실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을 미더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실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가 믿음에 따른 축복을 성실한 사람 야곱에게 전해주었다. 자만하거나 거만한 사람 에사오에게는 약속된 은총과 축복이 상속되지 않았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실성은 많은 시련과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나에게 돌아올 몫이 있으니 세월을 보내면 주어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약삭빠르고 성실한 사람에게 빼앗기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여러번 넘어지면서 끝까지 골고타 산으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장작으로 쓸 땔감위에 앉아 있는 이사악을 둘러메고 제단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과 사뭇 대조적이라고 생각된다. 때로는 주님의 은총이 하찮고 귀찮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교회안에서 어느정도의 위치에 서있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에사오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장자권을 하찮게 여기고 주님의 축복만을 받으려고 한다면 주님의 은총인 직분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축복마저 빼앗아 갈 것은 당연하리라고 생각해 본다.
제4주간: 요셉과 열두 형제
범 위: 창세 37-50장
<요약>
요셉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이 된 열두 아들 중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다. 그 이유는 요셉은 야곱이 늘그막에 얻은 자식이요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첫 자식이기 때문이다. 형들의 질투와 미움을 산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가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편애와 자신의 지각없는 행동으로 요셉은 숱한 역경을 만나게 되지만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한다. 요셉의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용모에 반해 그를 유혹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히려 강간 미수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웠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파라오의 꿈을 밝혀 주었다. 파라오와 대신들은 요셉의 꿈 풀이와 슬기로운 제안이 마음에 들어 요셉을 이집트의 재상으로 임명하고 국사를 모두 그에게 맡겼다.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조된다. 첫째는 자기가 섬기는 하느님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능력과 주권을 행사하는 지역 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는 온 세상의 주님이심을 잘 알고 있다. 둘째는 하느님을 경외하여 정의와 윤리에 어긋나는 처신을 단호히 거절한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와주려는 뜻과 도와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 끝으로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의 이유를 깨닫는다. 아버지의 편애와 자신의 부주의한 처신, 그리고 무엇보다 형제들의 질시와 미움 때문에 한동안 고통을 받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경우처럼 인간의 죄와 실수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신다는 진리를 깨우친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집트로 가기 위해 자기 식구들과 재산을 거두어 길을 떠나는데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이집트로 가는 것을 꺼리지 마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반드시 다시 올라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악에게는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야곱에게는 이제 고향을 떠나 이집트로 가라고 하신다. 하느님은 늘그막에 낯선 땅으로 이주하게 되는 야곱에게 그곳에서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그 약속은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낯선 땅에까지 야곱을 동행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죽고 난 다음 요셉의 형제들은 화해를 한다. 이렇게 요셉은 이집트의 나그네살이가 끝나고 선택된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정착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묵상>
하느님은 어느 일정한 곳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보살피시고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당신과 맺으신 약속을 이행하시되 당신이 원하시는 시기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끄신다. 때로는 형제들간의 시기와 질투를 통해서도 은총과 축복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불안정한 유목 생활이 아닌 편안한 정착 생활에서도 기근과 시련은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도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이끌어 내시어 진리를 깨우쳐 주신다. 요셉이 낯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후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것처럼 내가 만약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떠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제5주간: 모세의 선택과 이집트 탈출
범 위: 출애 1-15장
<요약>
이스라엘의 성조 요셉도 자기가 당한 고통이 야곱 집안을 살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 같이 모세도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고통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이집트인들마저도 이용하시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어 왕궁의 특권을 누리며 안락하게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고역을 겪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참지 못해 이집트인 하나를 쳐 죽이고 미디안 족이 사는 시나이 광야로 달아난다. 자칫 파라오 왕궁의 안락한 삶에 안주할 수도 있는 모세를 하느님이 시련의 장소인 광야로 불러내신 것이다. 또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헤매게 될 것에 대비하여 그곳의 풍토를 미리 익히게 해주신 것이다.
모세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볼 수 없으니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라며 불타는 떨기 가운데에서 나타나신 하느님의 소명을 받는다. 모세는 막강한 파라오의 권력 앞에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자신의 처지를 보고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에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친히 그의 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모세는 받은 소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려 파라오 앞에 나아가 그분의 백성을 광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파라오는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공사 감독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더 혹독하게 부리라고 명령한다. 모세는 자신에게 파라오를 설득시킬 능력이 없음을 알고 실패가 두려워 뒤로 물러서려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모세에게 요구하신 것은 일의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당신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야훼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에게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깨닫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일으킨 열 가지 재앙은 야훼야말로 온 세상과 인류의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깨우치게 하는 구실을 한다. 파라오는 아홉가지 재해를 겪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서 자기 맏아들까지 잃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준다. 모세는 성조 요셉이 남긴 유언대로 그의 유해를 모시고 광야로 떠난다. 주님께서는 낮에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고 밤에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며 이스라엘의 순례 길에 밤낮으로 동행하여 주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신다.
<묵상>
해방된다는 것, 풀려난다는 것,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와 누구를 위해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해방과 자유를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특별하고 독특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자유롭기를 바랄 것이다. 자기를 부리거나 지시하거나 혹은 소소한 부탁조차도 거부하며 평화롭게 간섭받지 않는 삶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러한 자유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해방도 자유로움도 무의미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원조 때에는 억압도 고통도 없었으니 해방도 자유로움도 없었다. 그러나 인류가 원죄로부터 이어오는 억압 앞에서 어떻게 나만을 위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으며 내 집안만을 위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으며 내 민족만을 위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제6주간: 광야의 시련과 시나이 계약
범 위: 출애 16-24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의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모세에게 대들고 불평한다. 겉으로 보기에 광야에서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 사이의 갈등인 것 같지만 사실은 백성들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고달픈 삶에 좌절하는 대신 자유로운 삶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굳게 믿고 충실하게 살아가며 거기에서 오는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고달픈 삶은 그들이 미숙함을 버리고 성숙함으로, 노예근성을 벗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련의 무대인 것이다.
시나이 계약은 모세오경의 정점이다. 천지창조부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모든 통교와 관계가 이 계약으로 요약되며 선택된 민족의 장래가 이 계약으로 방향을 잡는다.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이 노아,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나이 계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이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또 이 계약에 충실한 백성은 사제들의 왕국이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는 복을 받는다.
십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은 첫 번째 말씀이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에서 보듯이 계명을 내리기 전에 먼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빼내 주셨다는 내용이 있다. 신약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십계명에는 하느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중요한 말씀이 빠져 있다. 그래서인지 십계명 하면 먼저 그것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느님의 은혜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계명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이어져야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 부분은 유일신 공경에 관한 가르침이고 둘째 부분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한 가르침이다. 처음 세 가지 계명이 첫째 부분이 속하며 나머지 일곱 가지가 둘째부분에 속한다. 첫째부분이 길고 장황한 설명을 곁들이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유일신 공경이 중요하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고대 근동의 신들, 곧 풍산신 숭배에는 현대인들의 기준으로 보아도 신전 안에서의 종교적 간음이라든가 유아 제사 등 불건전하고 반윤리적인 행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일신에 대한 올바른 공경은 불건전한 다신교 풍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로 통했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운 열 계명 가운데 이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한 것이다.
<묵상>
계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고 그대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먼저는 하느님과의 약속이고 다음으로 사람과의 약속이다.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섬겨라’,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고 하는 세 가지의 계명 말고는 모두 인간 삶에 관련된 도덕적 윤리적 규범이다. 종교인,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네 번째 계명부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럼 종교인이 아니거나 신앙인이 아니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니면 위의 세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인간이라면 분명하게 인간적인 계율에 앞선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계율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을 멀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계명을 멀리하고 인간의 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은 알곡은 버리고 쭉정이만 모아들이는 허무한 노릇일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니 ‘허무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참 좋으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7주간: 종교 제도의 완성
범 위: 출애 25-40장
<요약>
예배 장소를 일반적으로 성소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 광야에 있을 때는 이 성소를 수시로 옮겨야 했다. 성소와 사제직이 필요한 가장 근본적 이유는 하느님이 선택된 백성 한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현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성소를 세우라고 하신 목적은 이곳을 통하여 당신을 들어 높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하느님은 온 세상 안에 계시는 분이시지 어느 한 곳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하느님이 한 장소에 거처하겠다고 하신 것은 온전히 그분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결정이었다. 이 현존의 성소로써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과 좀더 가까이 지내며 험한 삶의 여정에서 그들을 도우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금송아지 사건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계약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시나이산에 올라간 모세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몰려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신, 눈앞에 두고 섬길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아론이 그들의 요구대로 금붙이들을 모아 수송아지상을 만들자 그들은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바치고 흥청거리며 놀았다. ‘흥청거리며 놀았다’는 표현은 풍산신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경신례적 간음을 뜻하기도 한다.
금송아지 사건이 끝난 다음에 모세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제가 당신의 눈에 드셨다면 저의 갈 길을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잘 앎으로써 항상 당신 눈에 들게 해주십시오, 이 민족이 당신의 백성인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모세는 사제직을 완벽하게 수행한 인물이다. 사제란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를 잇는 중개자이다. 중개자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려면 양쪽을 잘 알아야 한다. 모세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저의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하고 기도하는 모세의 태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큰 귀감이라 할 수 있다.
<묵상>
내가 성소를 받기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분명 많은 점에 있어서 다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몸에 배었던 문화적 종교적 체험들이 시나이 광야에서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새로운 계약을 받고 홍해를 건너 새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의 생활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모세가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의 행위는 새 백성으로 불림을 받았더라도 몸에 베어있던 습관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모습도 흡사하다고 본다. 요즘은 의식주에 관련한 환경적 시련과 고통보다는 시각적 감각적 유혹이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시련을 안겨주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다의 물 한 방울만큼 미약한 존재이기에 그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유혹에 빠져들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제8주간: 경신례와 사제직에 관한 규정
범 위: 레위 1-16장
<요약>
고대 유다인들에게는 무의식적인 죄와 의식적인 죄 사이의 구분이 문제되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잘못도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었으므로 모든 죄는 반드시 속죄되고 보상되어야 한다고 봤다. 심지어 어려서 또는 젊어서 죄책감 없이 지은 죄들도 속죄되어야 하며 보상되지 않으며 나이들어서 견뎌내기가 더 어려운 시기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사 예식을 거행하는 데 사제가 수행하는 역할은 예배자들을 돕는 것이지 신적인 능력이나 마술적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사제는 예배자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신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달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제는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중개자이다. 모든 재물은 그 거룩한 성격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정확하게 바쳐야 한다.
거룩함(聖)과 속됨(俗), 깨끗함(淨)과 더러움(不淨)은 윤리적인 개념이라기보다 하느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와 관련이 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그분과 관련된 모든 것도 거룩하므로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그분의 법과 규정을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 그분의 규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하느님과 반대되는 것들과 철저히 단절되어야 한다. 깨끗함은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부정(不淨)하게 된 상태는 윤리적인 죄악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정하게 된 사람은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합당한 의식절차를 거쳐 깨끗한 상태를 회복하고 격리된 처지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건강한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 거룩함을 향하여 불린 이스라엘의 선택, 부정과 죄를 벗어야 할 필요성,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등이 모두 속죄일에 예식을 행함으로써 화해된다. 속죄일이 오면 대사제는 두 가지 예식을 거행한다. 먼저는 자기 자신을 위해 화해의 예식을 하고 다음으로 백성을 위한 예식이다. 이렇게 주님 앞에서 죄를 벗고 깨끗해진 대사제와 백성은 새롭게 일상의 삶을 시작한다.
<묵상>
교회법에 의하면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뒤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대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고 전한다. 성실하게 자기의 대죄를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드러나는 죄와 드러나지 않는 죄를 깊이 있게 성찰해야 만이 가능할 것이다. 주일미사를 빠진 것만이 죄이고 주일에 미사드리러 가면서 차량 접촉사고로 심한 다툼을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매일 매 순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함을 의식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하는 모든 행동을 거룩하거나 거룩하지 않거나를 살펴서 따지기보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행동하는 것이 속죄의 삶을 사는 기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제9주간: 성결 법전과 부록
범 위: 레위 17-26장
<요약>
레위기의 전반부(1-16)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정립하는데, 후반부(17-25)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후반부에서 말하는 수평적 관계도 하느님을 배제한 순수한 인본주의 개념 아래에서 정립되는 것은 아니고 언제나 그분께 드리는 경신례의 틀 안에서 정립된다. 모든 생물의 피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인간이 마셔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집트인들과 가나안인들의 풍산신 숭배 의식과 사회생활에서 통용되던 비정상적인 성행위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여태껏 몸담아 왔던 이집트의 관습과 오래지 않아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의 관습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마련한 규정들을 따르라고 하신다. 근친상간, 간음과 간통, 유아 제사, 동성애, 동물과의 교합 등은 모두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을 해치며 약속된 땅에서 번성해야 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사제들과 이스라엘의 공적인 예배생활은 매주 맞이하는 안식일과 여러 축일에 있다. 안식일은 가장 기본이 되는 축일이고 과월절과 무교절, 첫 추수절,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 주간절, 새해, 속죄일, 초막절 등이 있다. 특히 안식년과 희년은 가장 은혜로운 시기로 일상의 진부한 삶에 휴식과 회복과 쇄신과 용서를 제공한다. 일곱 해마다 찾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말고 그곳에서 저절로 자란 곡식을 먹어야 한다. 이때에 하느님이 안식년과 그 이듬해까지 먹고 살 양식을 마련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안식일이나 안식년의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인간의 삶이 단순히 노동, 재산, 권력, 성공 등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고 쉰 해마다 돌아오는 희년(禧年)에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고 종들을 풀어주며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 규정은 네가지 원칙에 바탕을 둔다. 첫째는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을 경외하여 동족을 착취하거나 동족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둘째는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주님께 속해 있다. 주님께서는 그 땅을 그들의 노력이나 능력에 따라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당신의 호의로 주신 것이다. 넷째는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모두 주님께 속해 있다. 따라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 원칙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거룩한 민족 안에서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계약에 참여했기에 하느님 백성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고 그분의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계약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주어지고 이러한 순종에 따르는 가장 큰 복은 어떤 물질적 복보다도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어 그들의 순례 여정에 동행하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현실이다.
<묵상>
이렇게 새로운 법전과 규범을 정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토대를 이룬 것은 마땅히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식일과 안식년에 지켜야 할 규범들과 규정들이 시나이 계약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만 국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때 규범을 정할 때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나타난 사람이라면 그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좋은 취지에서 규정되고 시행 되지만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생활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리하여 묶인 동족을 풀어주기는커녕 더욱 착취하는 수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도 일찍 입교한 교우나 늦게 입교한 교우가 서로 도우면서 한 교회 안에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