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을 읽고-G.르페브르(교회사특연)
G. 르페브르의 『프랑스 혁명』을 읽고
-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혁명 -
교회사특연/ 20109101/ 연구2년/ 김용석(손자선토마스)
들어가는 말
르페브르는 노르 지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혁명기에 있어서의 노르 지역의 농민>이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의 여러 저서들1)이 있지만 이 책은2) 그간 프랑스 혁명의 평가에 있어서 소외된 계층인 농민들의 역할을 부각시켰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귀족혁명, 부르주아 혁명, 민중혁명, 농민혁명의 네 부분으로 분류하여 프랑스 혁명의 부분이 아닌 전체를 전개하려고 하였으며, 어느 계층도 혁명에서 열외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농민 봉기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특별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절하 되거나 연구에서 소외되는 경향에 대한 저자 자신의 자구적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특히 할 만한 것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혁명 당시 농민계층의 열악한 가난을 혁명의 원인으로 보면서 극도로 궁핍한 농민들의 생활이 혁명발생의 요인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르페브르는 그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은 극도의 가난을 체험할 만큼 궁핍하지 않았고, 농민들 스스로 혁명에 가담했음을 강조하면서 농촌의 실상을 상세히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상기하면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계층별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 귀족혁명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에는 실질적으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두 계급만이 존재했다. 귀족은 혈통과 명예스러운 권리에 대한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 루이 14세가 죽은 후부터 왕권과 귀족의 투쟁은 가속되었다. 귀족은 관직을 독점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중앙 권력에 참여하고 모든 지방 행정을 독점하려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귀족 계급은 최고법원과 삼부회를 중심으로 왕권을 압박해 나갔다. 그들은 왕권에 대항하여 법원, 지방 삼부회, 그리고 고위 성직자의 연합 세력들과 공동협력을 폈다. 이러한 귀족 계급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하여 르페브르는 귀족들은 절대왕권보다는 삼부회를 통해서 그들의 특권이 유지되기를 바랐으며, 그들은 삼부회를 장악하기 위해서 제3신분의 요구인 평등과 자유의 보장을 왕으로부터 승인케 하려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제3신분을 이용하여 그렇게 마음대로 주무를 것으로 본 것은 착오였다.
2. 부르주아 혁명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로부터 가장 가난한 거지에 이르기 까지 모든 평민을 아무런 구별 없이 제 3신분에 포함시켰다. 부르주아지의 기원은 농민이었으나 사회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농민층으로 갈라져 나와 그들만의 향유를 누릴 정도로 유복한 편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귀족 계급을 공격함으로써 사회 계층제를 부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부르주아지의 생각은 모든 사람들에게 출생의 차별은 불필요하며, 보편적인 경쟁을 통해서 인류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 제3신분의 세력이 점차 체계화, 조직화되자 왕실은 귀족 계급의 편을 들었다. 지금까지 귀족 계급에 대하여 품었던 불평을 털어버리고 전통적인 사회 질서의 공동수호를 위해서 서로 손을 잡게 되었다. 이에 제3신분의 주축을 이루던 부르주아지는 귀족 계급과 마찬가지로 삼부회를 통하여 그들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 나갔다. 그들은 삼부회를 국민의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신분별 회의라는 인상마저 떨쳐버렸다. 이에 왕은 삼부회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국민의회는 곧 무력이 사용되리라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형편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민중의 폭동이 일어났다.
3. 민중혁명
혁명 이전에 기근으로 인한 흉작이 연이어 발생했다. 농촌에서는 일자리가 언제나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과부, 노인, 불구자 등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와 농촌을 떠돌며 걸식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걸인 행세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내보내며 ‘빵을 구해 오라’는 것은 당연한 일로 알았다.3) 이들은 ‘비적’으로 취급되어 귀족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드디어 1789년 7월 14일 파리 혁명이 일어났고, 난폭해진 민중은 생 라자르의 양곡 저장소를 약탈했다. 곧 이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다음 날 7월 15일 왕은 국민의회에 나타나 자기의 선한 의도를 설명하고, 집결했던 군대를 철수시켰으며, 재무장관이었던 네케르를 소환하였다. 그리고 파리 시청으로 가서 국민들의 휘장인 삼색기를 모자에 달고 베르사이유로 돌아가야 했다. 이에 민중은 왕을 ‘정복’하였다고 하며 열광적인 기쁨으로 환호하였다. 도시 못지않게 농촌도 국민 의회의 법령을 시행함에 있어서 해방을 꾀한 주인공이었다.
4. 농민혁명
프랑스 왕국의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혁명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농민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789년 농민들로 하여금 대규모반란을 일으키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귀족계급, 부르주아계급에 이어 농민에게도 마찬가지로 삼부회의 소집이었다. 자영농민들은 진정서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직접 경영을 비난하고 대규모의 소작지는 분할하도록 요구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농민들은 왕의 과세보다 교회나 귀족 계급의 장원 영주의 부과조를 더욱 증오했다. 특히 귀족 계급이 비적과 외국의 군대를 매수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비적에 대한 공포’가 도시와 농촌사회에 만연하였다. 농민들의 폭동은 결코 7월 14일을 기다리지 않았다. 물론 3월 말 마르세유의 민중폭동이 기폭제가 되었다. 이어서 가프지방의 아방스 골짜기의 마을은 4월 20일에 영주들에 대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5월 6일에 캉브레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즉시 피카르디 지방까지 퍼졌다. 또한 파리와 베르사유 근방 농민들은 사냥의 대상이 되어 있는 짐승과 새를 몰살하기 위해 삼림을 습격하여 감시원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윽고 7월 14일이 되자 네 개의 큰 반란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노르망디에 숲 지대에서, 두 번째는 페르시 북방의 시장에서, 세 번째는 팔레즈에서, 네 번째는 캉의 애국파가 그 곳의 영주의 성을 점령하였다.4) 농민폭동이 더욱 확대 된 것은 귀족 계급이 ‘비적’이 비적을 몰고 오리라는 공포가 한몫을 한 것이다.
나가는 말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네 계층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이 국민의회로 하여금 토론의 장을 통하여 대화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입장을 스스럼없이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국민의회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 한 것은 중요하게 보인다. 특히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제3신분의 어느 누구도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한,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귀족들과 교구사제들의 협조와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협의 차원에서 성과물을 도출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인권선언을 도출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일류 지상주의 가치를 뒤쫓는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 억압받고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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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페브르의 저서로는 <영국 헌정사: 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1907); <프랑스 혁명에 관한 베르그 지방의 식량문제>(1914); <앙시앵 레짐 말기의 토지 소유 분포>(1928); <국유 재산 매각 문제>(1928); <공포정치기의 농업문제>(1932); <1789년의 대공포>(1932); <프랑스 혁명과 농민>(1933); <제국민과 문명: Peules et Civilizations>(1951)
2) 르페브르의『프랑스 혁명: 89(Quatre-vingt-nenf)』은 1939년 프랑스 혁명의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씌어졌다. - G. 르페브르,『프랑스 혁명』, 민석홍 옮김, 을유문화사, 1995, 307쪽 <해설> 참조. 알베르 소부울은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 La Revolution francaise』(1962) 서문에서 G. 르페브르의 업적을 평가하는데, 그에 의하면 르페브르는 ‘다양한 계급 사이의 적대적 관계와 투쟁을 이해하고 혁명의 운동의 흐름을 분명히 파악’하는데 지대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 한다. - 알베르 소부울,『프랑스 혁명: La Revolution francaise』, 최갑수 옮김, 두레, 1994, 저자서문V 참조.
3) 1790년에 실시한 제헌 의회의 조사에 의하면 273만 9,000세대였고, 이는 2천 300만 명의 프랑스 인구 중 약 1,000만 명이 구호 대상자였으며, 그 중 300만 명이 극빈자, 즉 걸인이나 다름없었다고 르페브르는 기록하고 있다.
4) 그 밖에도 누아로, 마엔, 스카르프, 상르, 프랑시 콩데, 브줄 캥시, 두브 인근 30여개의 성 약탈 및 방화, 알자스, 마코네, 코르마탱, 클루니 수도원 등이 습격을 받았다. 이러한 폭동은 무엇보다도 귀족 계급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농민들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는 봉건적 부과조를 폐지시키는 것과 부과조 징수 문서를 태워버리는 것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