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불교의 공(空) 관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의 이해

jasunthoma 2010. 6. 15. 20:57

불교의 공(空) 관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의 이해

- 스즈키 다이세스와 토마스 머턴의 공에 관한 대화를 중심으로 -

 

I. 들어가는 말

 

불교 개념 중 대표적 개념은 무아(無我), 연기(緣起), 오온(五蘊)인데 이는 공(空)으로 소급할 수 있다. 스즈키 다이세쓰에 의하면 ‘지식’은 ‘무지’이며 이는 곧 참된 지혜의 천진함, 공 또는 ‘진여(眞如)’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에 의하면 공은 천진한 가난으로 관찰되는데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불교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려워지는 장애요인이 된다. 그리고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불교는 무신론이나 허무주의로 소급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비존재로서 무의 개념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공의 개념인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무아(無我) 개념을 추구하는 데서 두 종교간의 벽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리스도교의 신학도로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불교의 개념적 어원을 짚어보겠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한 토마스 머턴과 스즈키 다이쎄스공에 관해 살펴보고 유사한 면이 있다면 사상적 접근을 시도해봄으로써 두 종교간에 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은 논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본론

 

1. 불교의 깨달음

1) 사성제

무아는 붓다의 핵심사상 중 하나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제일 먼저 네 가지의 깨달은 진리를 가르치셨는데 이를 사성제(四聖言帝)라고 한다. 즉 고(苦)성제, 집(集)성제, 멸(滅)성제, 도(道)성제이다. 고(苦)제는 우리가 이해해야할 진리로서 풀어야 할 해(解)의 대상이고, 집(集)제는 고통의 원인으로서 끊어야할 단(斷)의 대상이다. 멸(滅)제는 깨달아야할 진리이므로 증명하고 알려야할 증(證)의 대상이고 도(道)제는 열반으로 가는 수행의 길로서 닦는 수(修)의 대상이다.

첫 번째 고(苦)성제는 이른바 “사고-팔고(四苦-八苦)”다. 이는 여덟 가지 인간의 고통을 말하는데 태어나는 고통인 생고(生苦), 늙어가는 고통인 노고(老苦), 아파하는 고통인 병고(病苦), 죽음의 고통인 사고(死苦), 이별의 고통인 애별이고(愛別離苦),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소유하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구불득고(求不得苦), 다섯 가지를 쌓아서 이루어야 하는 오온성고(五蘊盛苦)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집(集)성제는 집착에서부터 우리의 고통이 온다는 가르침으로 감각, 제물, 명예, 권력, 쾌락, 고정관념, 선입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있는데 이러한 집착은 원인과 결과의 반복적 지속과 악순환의 과정이므로 끊어야 할 대상이다. 집착은 갈망의 결과이고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무지(無明)로 귀착된다. 이런 순환의 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12지 연기설(緣起說)인데 이 12개의 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無明)이다. 고(苦)의 가장 중요한 조건적 원인이 되는 것이 이 무지이다. 이 무지를 제거면 고의 종식, 즉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세 번째 멸(滅)성제는 고의 종식, 극복이 가능하다는 진리이며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깨달음(證)의 대상이다. 그리고 네 번째인 도(道)성제는 고통을 멸(滅)하는 구체적인 길에 관한 진리로서 팔정도(八正道)를 통해서 이룰 수가 있다.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이루어진다.

 

2) 연기

연기설을 좀 더 살펴보자면 불교의 전통적인 연기설(緣起說)의 특성을 언급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음으로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起)는 일종의 인과관계성 연기설이 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인 공(空) 관에 입각한 연기설까지 이르는데 그것은 인과성보다 상의상제성(相依相在性)을 부각시켜 일절존재는 무자성적(無自性的) 존재, 즉 공(空)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데까지 도달한다.

일반적으로 원시불교경전에서 보는 중도(中道)의 이론상의 의미는 유(有)와 무(無), 상(常)과 단(斷) 등의 대립되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음이며, 실천적인 의미로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고행이나 쾌락 그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런데 중론(中論)에 나타난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와 달리 두 가지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무기(無記)로서의 중도(中道)이고 다른 하나는 연기(緣起)로서의 중도(中道)이다.

무기(無記)로서의 중도는 대립적인 공과 불공(不空), 그리고 단순히 부정적인 공과 긍정적인 공과 같이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는 공은 참된 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멸(寂滅)한 상(相) 중에는 항상(恒常)하다든지 무상(無常)하다는 등의 네 가지 진리가 없다. 적멸한 상 중에는 끝이 있다든지 끝이 없다든지 하는 등의 네 가지가 없다(寂滅相中無 相無相等四 寂滅相中無 邊無邊等四)” 이런 경지를 뛰어넘는 것이 중도의 경지이다. “만일 모든 존재가 공(空)하지 않다면 오히려 생겨남도 없고 소멸됨도 없으니 무엇이 끊어지고 무엇이 소멸되기에 열반(涅槃)이라 칭하겠는가?(苦諸法不空 則無生無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연기(緣起)로서의 중도는 일반적인 연기의 기본법칙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에서 저것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고 하는 인과관계를 사물 존재의 보편법칙으로 인정하였으나 오히려 생사윤회의 해탈을 위한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기에는 미흡하다. 그래서 위의 두 가지 의미를 다 충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중도연기(中道緣起)라 할 수 있다.

 

3) 오온

붓다는 항상 변하는 인간의 자아를 가리켜 오온(五蘊)의 존재라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실체적 자아와 어떤 항구적 자아, 혹은 주체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인간은 수시로 변하는 여러 요소의 임시적 결합체일 뿐, 어떤 항구적인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가령 우리가 ‘나의 몸’, ‘나의 감정’, ‘나의 생각’이라고 말할 때 몸, 감정, 생각 등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는 어떤 자아 내지 주체가 우리 몸이나 감정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변화무상함을 늘 겪고 있는 오온(五蘊)의 상태에 얽매이기에 인간에게 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점을 좀 더 중립적으로 본다면 붓다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비아(非我)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오온 가운데 어느 것도 ‘참자아’란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아가 아니라는 뜻으로 ‘비아’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공(空) 개념에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비아’보다는 먼저 무아(無我)로 이해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 같다.

 

4) 무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ex hihilo nihil fit)라고 하며 ‘무’는 ‘무’로서 그 자체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소극태(消極態), 결여태로서 제 이차적으로만 인식되었다. 즉 어두움이 빛의, 악이 선의 결여된 상태라고 생각 된 것처럼 ‘무’가 ‘존재’의 결여태, 즉 비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파(部派)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교의에 편중하여 인간의 자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감각으로 객관적인 실체를 직접 인지하거나 감각으로 객관적인 실체를 추론할 수 있다고 보며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법(法)의 존재를 인정하는 법유아(法有我) 사상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한정된 무아(無我)에서 더 나아가 법의 이론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객관적 실체로서 법의 존재를 인정했는데 일체의 사물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무아(無我)이지만 이 오온의 요소와 그러한 요소를 구성하는 연기(緣起)는 실재한다고 보았다. 이때 오온이나 연기를 곧 법으로 보았다. 즉 법(法)이란 불연속적인 것으로 서로 분리되어 복합성이 없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단지 무명(無明)에서 조작한 사유(思惟)의 산물이라 했다. 이것이 법유(法有)사상인데,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은 객관적인 법으로써 조성된 것으로서 상대적이므로 따로 독립된 자존성(自性)을 갖지 않는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곧 무공 법유(無空 法有) 혹은 인무아(人無我) 법유아(法有我)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이 더 발전하여 대승불교는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단지 변화 속에 던져진 오온이라는 요소들의 일시적인 덩어리일 뿐이라는 법무아(法無我)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 사상은 소승불교의 무아론과 더불어 인간에게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법, 모든 현상이 실체성을 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인무아(人無我, 인공人空) 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 법공法空)까지 인식해야 참다운 지혜의 공(空)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법공(法空)은 바로 형이상학적 본성의 의미를 말한다. 즉 이러한 현상은 인연(因緣)에 의한 가유(假有)로서 실체를 갖지 않는다.

 

2. 스즈키가 말하는 지식과 천진함

1) 천진한 에덴동산의 지식

머턴과 다이세쓰의 공(空)에 관한 대화를 통해서 이해한 자아는 천진함의 자아와 도덕성의 자아로 구분된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권위인 십계명 앞에서 무신론자들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데 그것은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덕적 규범들을 존중하지 않듯이 불교의 수행자들도 윤리에 입각한 도덕율을 격하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며 다이쎄스는 불교의 수행자들 또한 사회 밖에서는 살 수 없으므로 윤리적 가치들을 무시할 수 없음에 동의한다. 그러나 “원조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획득한 ‘지식’ 때문에 발생한 모든 불순물들이 완전히 정회된 마음을 갖기를 원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다이세쓰는 지식과 천진함을 대비하여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사상적 입장을 대변하고자 한다.

 

천진함에 대한 유다-그리스도교적 개념은 불교의 공의 형이상학적 교의를 도덕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개념들은 지극히 모순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보완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자아(自我)는 도덕성의 자아로서 그 도덕적 권위는 십계명으로부터 나오며 이 계명들을 알아듣는 지식을 획득한 자아가 도덕성의 자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과 다른 점이 생기는데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이미 그 의식 자체만으로도 사물을 판단하게 되어 있어 무아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도덕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모든 종류의 구별을 공(空)과 진여(眞如)의 본래의 빛을 어둡게 하는 무지의 산물로 본다.

 

2) 가난함

머튼과의 대화에서 다이세쓰는 불교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추구해야 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미덕은 가난이라고 했다. 가난은 존재론적으로는 공(空)에 해당하며, 심리학적으로는 무아(無我)와 천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삶이 곧 천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머튼과의 대화에서 다이세쓰는 에카르트의 가난에 대한 정의인 무원의(無願意), 무지(無知), 무소유(無所有)에 동의하며 자아의 천진함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으로 가난해 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공(空)의 깨달음은 실물처럼 자아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영성훈련의 가장 거대한 장예물이 되는데 우리의 영성훈련은 자아를 제거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아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다는 것이 다. 이 깨달음이 바로 마음의 ‘가난함’이다. 이 ‘가난함’이란 ‘가난해짐’을 의미하지 않는 다. ‘가난함’이란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이 다∙∙∙ 철저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모든 것이 된다.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면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이렇게 다이세쓰는 영혼의 정화에 있어서 하느님의 수동적 개입에 관한 에카르트의 입장을 견지하며 영혼의 참된 가난의 상태는 하느님이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자리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데 있으니, 그 때에 나 자신은 하느님 자신이 활동하는 장소가 되고 직접 활동하시는 무대가 되는 만큼 인간의 자아란 천진함이 회복되면 무아에 이르게 됨을 역설한다.

 

3) 실천적 도덕율

다이세쓰는 머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교에도 도덕적이며 분별성에 입각한 실천적인 덕이 있음을 피력한다. 그것은 여섯 바라밀다라고 불리는데 열거해 보면 ①보시-주는 것, ②지계-지킬 계율, ③인욕-겸손과 인내, ④정진, ⑤선정-명상, ⑥반야-초월적직관인 반야 이다. 이 여섯 밀다는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한다. ‘보시’ 즉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도 마지막 단계의 반야인 공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초월적 지혜인 공에 이르는 것도 무조건적인 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주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내가 주는 것이 아닌 공(空)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일체는 모두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인간의 온갖 고통도 역사도 이 연기설에 의해 해결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즉 연기를 아는 것이 바로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여 연기를 보는 것이 곧 진리(法)를 보는 것이며 이른바 연기는 진리(法) 자체이다.

 

3. 머턴이 말하는 낙원의 회복

1) 지상낙원의 자아

다이쎄스와의 대화에서 머턴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착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를 들며 여기에서의 낙원은 천국을 의미하지도 않았고 의미했을 리도 없었음은 명백하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낙원의 상태를 제시한다.

 

우리는 낙원을 편안하고 관능적 쾌락을 주는 장소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 평화와 휴식의 상태이다. 그러나 사막의 교부들이 사막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을 때 그들이 추구했던 바는 잃어버린 천진함,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지녔던 마음의 텅빔과 순수함이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그들 자신 안의 낙원, 아니 그 들 자신 위의, 그들 자신을 초월하는 낙원이었다. 그들은 ‘선악에 대한 지식’ 때문에 깨 어져 버린 그 ‘일체성’의 회복에서 낙원을 찾았다.

그리고 머튼은 말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자아에 관해서다.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이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의지, 자기 자신의 자아, 자기 자신의 제한된 이기 적 영에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의 영’이 됨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결합된 이 들은 ‘하나의 영’입니다.”라고 말한 사도바오로처럼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의미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이 안에 사는 분은 같은 그리 스도이시다. 개별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낡은 사람’, 외부적, 자기중심적 자아에 대해 ‘죽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 자아는 없고 신적인 존재로, 한 분이신 그리스도,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이 되신’ 바로 그분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그리스도교 의 주요한 차이점은 불교의 언어와 실천이 훨씬 더 급진적이고 엄격하며 가차 없다는 점 과 수행자가 ‘공(空)’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는 진정한 문제를 혼란시킬 수 있는 어떤 이 미지나 개념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풍부한 은유적 표현과 구체적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우리의 외적인 표면을 뚫고 내적인 깊이에 도달하려는데 있다.

 

머튼은 천진함의 공(空)과 거짓 공(空)을 구분하면서 다이세쓰가 말하는 순수한 영혼의 참된 가난의 상태인 공(空)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시킬 수 없고 현재 이 고해(苦海)의 삶에 아무런 관심도 없이 기쁨에 차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데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천진함은 지식을 내버리거나 없애지 않는다. 천진함과 지식은 병존해야 한다. 사실 그 점에서 영적인 듯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던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너무 나 천진한 나머지 투쟁적이며 복잡한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삶의 일상적 현실에 대한 모 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천진함은 참된 천진함이 아니다. 그것은 허구적이 며 참된 영적 삶을 왜곡하고 좌절시키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정적주의자의 공, 단지 무 미건조하고 어리석기만 한 공이다. 그것은 지혜도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것 은 아기의 자기도취적 무지이지 아무런 사고나 자의식 없이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성인의 공이 아니다.

 

2) 지식에서 천진함으로 나아감

머턴은 지식에서 천진함 또는 마음의 정화로 나아가는 길은 유혹과 고투의 길이며 수행자가 이 길로 나아가는데 악마(유혹자)는 지식을 통해서 교만에 빠뜨리고 타락의 길로 유혹한다며 집착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겸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열정과 자아에 대한 집착과 ‘악마의 기만’에 의해 오도되고 있다⦁⦁⦁ 사막의 교부들은 수도승의 활동을 방해하는 악마의 가장 위험한 활동은 수도자가 도덕적 으로 완전할 때, 즉 그가 영적 자만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명백히 ‘순수하고’ 덕스러울 때 수행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집착들 중 가장 미묘한 맨 마지막의 집착, 즉 자기 자신의 영적 탁월함에 대한 집착, 정화되고 영화(靈化)되어 ‘텅 빈’ 자기의 자아에 대한 사랑, 완전한 사람들과 가짜 성인과 거짓 신비가가 흔히 빠지는 자기도취와의 투쟁 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천사의 방문을 받을 수 있는 장소인 자아도, 자랑할 수 있는 무아 상태도 소유하고 보유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참된 성스러움은 자신을 정화하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그분 자신의 초월적 빛 안에 현존하심이며 그러한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3) 낙원의 천진함과 공

머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빌어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는 형이상학적으로 자신의 존재 안에 친밀히 현존하는 존재에 ‘도달하려고’ 자의식 없이 노력하는 상태로서 인간 자신은 하느님 안에 숨어 있고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 때는 지녔지만 이제는 잃어버렸고 앞으로는 되찾을 수 있는 천진함과 관련하여 우리의 위치를 고찰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교부들이 지식 없는 천진함만을 지니고 살기를 원했다. 유혹이 없고 열정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이것은 ‘지식’의 세련일 뿐이다. 그것은 거짓 공, 너무나 완전해서 조잡한, 사고의 흔적 없이 그 자신 안에 머물 수 있게끔 정교하게 정화된 자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함의 주체이며 공의 소유자인 ‘자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적인 무력함을 참으로 발견한 사람, 자신이 텅 비었음을 깨달은 사람은 ‘텅빔을 획득’했거나 텅 비게 ‘된’ 자아가 아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잃었을 때 그 자아가 완전한 참 자아이다. 머턴은 사막의 교부들의 영적 투쟁의 삶을 예를 들어 분별(구별)의 미덕을 제시한다.

 

사막의 교부들이 영적 기만이라는 교활한 자물쇠를 연 도구는 분별이라는 미덕이었다. 성 안토니오가 사막에서 모든 미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분별이었 다∙∙∙∙∙∙ 분별은 천진함의 빛 속에서, 그리고 공(空)과 관련하여 그 기능을 수행한다. 분별 은 추상적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마음의 내적인 순수함에 따라 판단한다. 분별은 판 단을 내리고 선택을 하지만 그 판단과 선택은 항상 공 또는 마음의 순수함을 지향하고 있다. 분별은 겸손의 한 기능이며 악마의 비판과 왜곡이 미칠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는 지식의 한 분야이다.

 

4) 마음의 순수함에서 신인합일적인 천진함으로

마음의 순수함은 공의 개념에 가깝다. 즉 ‘완전하고 가장 순수한’ 마음, 다시 말하면 이질적인 생각과 갈망이 전혀 없는 마음이 바로 순수한 마음이다. 이 관상의 상태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영적인 생각까지도 배제하면 그 어떤 개념도 허용하지 않는다. 단지 ‘무지’를 통해서 하느님을 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서로에게 친근감을 가져다주더라도 마음의 순수함은 궁극적 목적을 향해 한 단계 나아간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낙원은 영적 삶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의 진정한 작업, 즉 새로운 창조의 작업, 죽은 이들을 부활하게 하는 작업,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는 작업을 위해 필요한 준비로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참된 차원, 그리스도교에는 특유하고 불교에는 그와 유사한 차원이 없는 종말론적 차원이다. 세상은 인간 없이 창조 되었지만 참된 하느님 나라인 새로운 창조는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작업이다. 그것은 최종적이고 완전한 결합이 일어나는 신인합일적인 작업이다.

 

4.불교의 인간관과 그리스도교의 신관의 차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신관과 인간관의차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나는 있는 그로다’라는 성경 말씀대로 존재자가 있고 그리고 피조물인 내가 있다. 즉 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는 이유는 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신과 나의 관계가 긴밀히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인간관은 있음도 있음이 아니고 없음마저도 없음이 아닌 공의상태를 지향한다. 그러니 나 자신도 없는 것이다. 불교는 창조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과 절대적 실재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을 직시하면 성불하는 것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그래서 불교의 구원관은 본성에 대한 자각(깨달음)으로 구원에 이르데 동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존재론적 초월과 다른 점이 생기는데 불교는 존재를 부정하지만 신적 인식론적 초월로 볼 수 있는 내재적 초월을 통해서 공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5.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깨달음의 형식

불교의 공(空)의 논리적 이해에 있어서 서양의 변증법적 형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일절실비실(一切實非實) 적실적비실(赤實赤非實) 비실비비실(非實非非實) 시제불법(是諸佛法)”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구원의 충만함의 논리적 이해에 있어서도 요한복음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변증법적인 가르침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말

 

몇 해 전에 EBS에서 방영된 다큐프라임 중국 공연단의 설 특집 춘절만회(春節晩會) 공연이 끝나자 중국 전(前) 국가주석 장쩌민이 감격에 차서 말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마음만 있으면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해도 언어가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 인터뷰 내용은 중국의 여러 사상에 입각해서 해석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공(空)의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사사무애(事事無碍)와 이사무애(理事無碍)로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사무애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아무런 막힘이나 장애가 없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사무애는 이(理)와 사(事)가 서로 별개가 아니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즉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고 있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단절과 막힘이 없다는 표현이자, 하나의 사물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온 우주에 하나의 사물이 들어있다고 보는 공(空)의 세계를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그렇다 인간이 서로가 서로에게 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위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다름은 아주 작은 부분의 입장을 각자가 따로 선취하여 각자의 생활에 맞게 발전시킨 데서 시작된 것 같다. 물리적으로 본다면 온전한 사람은 기체와 액체와 고체로 형성되어 있다. 이 세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결핍된다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며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고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는 불교의 공(空)사상을 일컬어 ‘기체중심의 사상’이라고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보이고 손에 담을 수는 있지만 움켜쥐면 잡히지 않고 스르르 빠져나가는 ‘액체중심의 사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각자의 사상안에서 풍성한 면들은 서로가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숨과 혈액뿐만 아니라 살과 뼈도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채 눈을 뜨기 전부터 어머니 품에서 사랑을 받았듯이 내가 하느님을 알기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고 말하고 “당신이 내 안에 아니 계셨던들 절대 나는 존재치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재차 고백한 것이다.

 

 

 

 

【 참고문헌 】

 

 

· 길희성, 보살예수, 현암사, 2004.

 

· 토마스머튼, 장은명, 선과 맹금, 성바오로출판사, 1998.

 

· 오강남,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현암사, 2007.

 

·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참된 종교, 분도출판사, 1989.

 

· 성 아우구스티누스, 최민순, 고백록, 성바오로, 1991.

 

· 박용조, 불교의 공 이해(I), 신앙과 삶, 창간호, 1997.

 

· 박용조, 불교의 공 이해(II), 신앙과 삶 3호, 1999.

 

· 성경,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