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르네상스 교황 율리오 2세와 스위스 근위병

jasunthoma 2009. 2. 28. 19:47

르네상스 교황 율리오 2세와 스위스 근위병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외세의 지배에서 이탈리아를 구하고 교황령을 확장하였으며,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 외교적인 수단과 무력을 동시에 사용하였기에 정치 교황 또는 장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스위스 근위병은 율리오 2세 교황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그는 군복을 미켈란젤로에게 디자인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스위스 근위병의 별난 제복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것은 아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1914년 교황직에 오르면서 한 무명의 바티칸 제봉사에게 스위스 근위병들을 위한 복장을 디자인했다. 그러나 그 무명 재봉사의 디자인 중 부풀린 소매 부분은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선출되기 전 식스토 4세의 보좌관으로 있었다. 그는 로잔느 교구의 주교였을 때, 스위스 군대의 용맹과 충정에 큰 감명을 받고 1478년 교황 비오 4세로 하여금 스위스의 여러 지역들과 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그 후 자신이 교황 자리에 오르자 150명의 스위스 병사들을 데려왔다.

     스위스 근위병들은 자신은 목숨을 바쳐 교황의 생명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한다. 1527년 5월 6일 샤를 5세 황제가 고용한 일만 명의 독일 및 스페인 용병들이 바티칸에 급습하였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단위에서 거의 전멸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였다. 그 전투에서 147명의 근위병들이 사망하였고 적군은 800명 이상 목숨을 잃었다. 남아 있던 42명이 스위스 근위병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추기경 13명을 천사의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1527년 처참한 죽음 이후로 스위스 근위병들은 다시는 전쟁에서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여야 할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그때마다 교황의 무장 해제 명령에 따라 무기를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를 침공한 나폴레옹이 교황을 프랑스로 압송해 갈 때도 그랬고, 2차 세계대전 동안 교황 비오 12세는 근위병들에게 병기를 놓게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 근위병들은 창과 도끼를 합해 만든 다소 우스꽝스러운 구식 무기만을 든 채 장갑 탱크가 줄지어 서 있는 나치 독일군과 마주 서서 바티칸 시와 이탈리아 사이의 경계선을 순찰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창 하나만을 든 스위스 근위병이 완전히 포위된 바티칸을 오르락내리락 순찰하는 동안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나치 군대가 수줍은 듯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광경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진기한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1)

     욜리오 2세는 비록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치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폭군(II Terribles)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해방자이면서 교회의 구원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2)  


1) 참조: 황치헌, 세계교회사강의록II, 2008, 12-13.


2) 참조: 김성태, 한국가톨릭대사전, 1997, 2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