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시편의 하느님

jasunthoma 2008. 12. 9. 15:23

시편을 노래함은 하느님과 인간의 영혼의 입맞춤이다. 문학유형으로 본 시편의 하느님은 공동체의 하느님이다. 시편을 포함해서 구약 성경 이곳저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이스라엘의 시는 순수 개별적인 것이 없다. 모든 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탄생된 공동유산인 것이다. 이 백성의 영감의 기본적인 출처는 예배행위였으며(민수 10,35; 탈출 15등), 이러한 종교행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임을 확신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연례 대축제, 봉헌의식, 감사의식, 기도, 토라 봉독, 계약 갱신 등 이 모든 행위는 야훼를 이스라엘의 하느님, 구원자로 고백하는 의식이었다. 신약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있어서 전례는 지나간 사건(특히 출애굽 사건과 그에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행위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말씀 그 자체였다. 구원의 역사는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선포되어야만 했으며,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 모인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과 그의 업적에 찬양과 신앙을 불러 일으켜야만 했다

 

시편 전체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상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흐름을 타고 있다. 만약 시편에서 찬미를 불러일으키는 찬양 시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종결된다면 욥의 말대로 ‘어찌하여 저를 낳으셨나이까?’라는 절규만이 세상의 마지막을 장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희노애락이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온갖 호화로운 생활로 인생을 즐겼노라고 자부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통의 몸부림으로 외치는 절규 섞인 호소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현세에서도 많은 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보다 복을 많이 받기가 쉽지 않다. 누구든지 고통을 덜 받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의 삶은 고통의 나날이며 절규의 몸부림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시편의 하느님은 세상의 고통을 변화시켜 주시는 부활의 하느님이다. 고통속에서도 부활의 기쁨이 솟아나오는 찬미의 노래다.

 

내가 생각하는 시편의 하느님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바로 지금 현세에 쉼 없이 복을 주시는 성실하신 하느님이시다. 그 복은 다름 아닌 끊임없는 자유다. 이 시각, 이 장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하느님이 주시는 자유이며 그 자유는 하느님의 복이다. 시편은 삶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밋밋하고 고리타분함까지 이 모두가 어떻게 기도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 것이며 화를 내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하고 즐거움에 노래하기도 한다. 성실한 찬미를 통하여 지금 넘어야할 난관을 극복할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하느님은 쉼이 없으신 성실하신 농부이시자 목수이시며, 어부이시자 목자이시며, 조각가이시자 설계가이시며, 작곡가이시자 성실하신 합창단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