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장례 미사 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경문을 듣게 되는데, 이를 통해 부활 한다는 의미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도 있겠지만, 지금 살아서 장례식장에서 미사를 드리는 산 사람들에게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금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에는 ‘한 처음’으로 시작한다. ‘세상 창조 때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으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기록한다. 이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근원에 대하여 환희 밝혀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의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니 내가 죽으면 이 세상에 내 존재가 없어지고, 더 이상 나와 똑같은 존재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허무한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실로 근심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한 번도 죽어보지 못했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죽으면 그와 같다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이 같을 수가 있을까? 분명한 것은 태어날 때에는 인간의 몸속에서 나왔지만 죽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써 육신은 썩어 없어지지만 내가 나왔던 육신과는 또 다른 어느 곳으로 옮아간다는 사실은 참이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지만 출생의 근원을 묻는다면 분명한 것은 육신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사실은 없다고 생각한다. 말씀,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는 성경구절에는 각각의 인격체가 모두 다르지만 그 생명을 향한 빛으로 나아갈 때,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빛이 비치듯이 나도 그 빛으로 빛을 내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내가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서 산다면 영원한 생명은 빛의 자녀가 누리는 당연한 선물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부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관념적인 부활이 아니다. 하루 낮과 밤이 지나가는 동안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형제를 보며 두려운 나머지 오늘 이 자리에서 시간이 멈춰버려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흐르는 시간과 변하는 공간 속에서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빛은 영원히 공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내가 서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사라지듯 순식간에 자나가 버리고 만다. 나는 빛의 한 조각으로서 세상에 비치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살아서 부활의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을 영위한다면 죽어서도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은 끝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곧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